저는 원래 책을 사서 모으길 선호하는 편인데도 의대와서는 교과서 구입하기가 망설여지더군요
1. 교과서 볼 시간이 없다
요즘은 의대에서 "교과서 보는 사람은 유급"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입니다
방대한 양을 공부해야하기 때문에 한가하게 교과서 읽고 있을 여유가 없죠
족보 제대로 숙지하고 시험장 가기도 벅차요
동기들과 이야기해봐도 이런식의 학습을 하는거에 회의감을 느끼는 친구들도 몇몇 있습니다만은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열심히 족보 외웁니다.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 투자해서 교과서 읽어봤자
족보에 충실히 공부한 친구들보다 시험을 훨씬 못보거든요
선배들한테 듣기론 저희 학교 선배 중에 정말 시험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혼자 고지식하게 교과서 정독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유급했다더군요. 쿨럭....
2. 책이 너무 두꺼워서 휴대가 곤란하다
그 두꺼운 책들을 책가방에 넣고 다니다간 디스크 올지도 모릅니다.
저희 학교도 교과서로 수업나가는 교수님이 몇분 계셔서 교과서가 반드시 필요한 수업이 있는데
강의실옆 사물함에 넣어두고 수업들을때만 꺼내서 수업듣고 다시 넣어둡니다.
무거워서 매일 집에 갖고다니면서 공부 못해요
요즘은 대안으로 태블릿기기를 이용해서 파일로 넣어서 보는 친구들도 있더군요.
그런데 한글번역서의 경우는 파일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3. 가격이 너무 비싸다
10만원 내외 책은 흔하고, 해리슨 같은건 20만원이 넘으니
이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친구들은 많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4. 판수가 자주 바뀐다
"판수가 자주 바뀌는 교재 = 업데이트가 잘되니 좋은 교재"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교과서를 구입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좀 난감한 부분도 있습니다.
당장은 족보보기에 바빠서 교과서 별로 안보더라도, 소장용으로 하나 장만할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입을 했더니
조금 있다가 신판이 나와버려서 제가 갖고 있는 책은 구판이 되어버리고 소장가치가 확 떨어지게 느끼거든요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구판이 될 책을 굳이 비싼 돈 주고 구입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적을 위해서는 교수님 강의록 + 족보가 우선입니다. 학생이 아무리 자기 스스로 교과서를 통해 학문을 연마하는게 좋다지만 이건 이상론이지요.
한 학생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 학생의 등록금을 대 주고 성적표를 받아보시는 부모님의 생각도 그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혹은 그 학생이 졸업한 후 학생을 선발하는 문제에서 이런 학생의 가치관이 성적표보다 우선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방학 때라거나 여유가 생기면 자기전공과 관계된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교과서정도는 정독하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요.
물론 교과서를 다 읽어도 세세한 디테일은 많이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교과서를 읽음으로써 그 학문에 내재된 사고체계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의사가 될 겁니다.
물론 실제로 일을 시작해보시면 아시겠지만, 병원에서는 제대로 evidence가 갖춰지지 않은 약제나 시술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또한 심평원 삭감으로 교과서와 동일한 practice를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문에 그럴 수록 더더욱 흔들리지 않은 자신만의 기초가 있어야겠지요.
2. 책이 너무 두꺼워서 휴대가 곤란하다
학교에서 공부한다면 사물함에 두고 공부할 수 있겠지만 도서관이나 집에서 공부한다면 들고다니는 것도 일이지요.
전 두꺼운 교과서는 다 뜯어서 챕터별로 다시 제본해서 들고다녔습니다. 책은 읽는게 중요하지 모양이 중요한게 아니니까요.
다만 의학은 (특히 내과는) 여러 분야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분권한 한 책만 가지고 갔다가 다른 분야 챕터를 봐야될 일이 있을 때 난감할 순 있습니다.
태블릿은 휴대하기 좋아서 버스, 지하철, 화장실(...)에서도 읽을 수 있는게 장점입니다. 게임, 문자, 인터넷 등 옆길로 새지만 않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태블릿으로 많은 교과서를 읽어봤지만 역시 진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용도로는 종이책이 좋더군요.
미국 교과서, 특히 hardcover는 꼭 의학만이 아니라 이공계 교과서는 다 비싸긴 합니다. 물론 다 읽지도 못할 책을 비싼 돈 주고 사기에 아까운 것도 맞기는 합니다.
의대생/레지던트라면 아직까지 학교 도서관/전자책을 이용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이용하길 바랍니다. 거저 주어지는게 아니라 도서관에서 출판사에 엄청난 금액을 주고 학생들을 위해 구독하는 겁니다.
(최근의 대학 도서관은 서책 구입보다는 전자저널 구독료로 대부분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으며, 재정난으로 골치를 썩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나중에 졸업해서 실제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런 식으로 교과서를 찾거나 논문을 찾는 것도 상당한 돈을 내야 됩니다.
4. 판수가 자주 바뀐다
해리슨은 e-chapter를 포함하면 거의 4000페이지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출판간기는 4년정도지요. 그 동안에 4000페이지를, 그것도 실제로 다 읽는건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내과만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교과서는 "다 읽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교과서는 아닙니다.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찾아보는 용도에 가깝지요.
전 하루 2-3시간씩 6개월 (중간중간 땡땡이 친 날들을 빼면 한 4-5개월?) 정도에 1500페이지 로빈스 병리학 원서를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해리슨은 로빈스 교과서보다 페이지도 많고 글자도 작아서 훨씬 더 오래 걸릴 거라고 봐야죠.
좀 더 얇은 교재를 하나 정해서 정독해보는 것은 어떤지요? 미국에는 대부분의 과마다 reference용 두꺼운 교과서 말고 학생용 좀 더 얇은 교과서가 많이 나옵니다.
근데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1. 지정한 교과서와 실제 수업하는 교과서가 전혀 다르다.
지정 교과서 기준으로 수업하는 의대 교수는 매우 적습니다. 기초든 임상이든.. 교수는 대개 개인 자료와 여러 교과서를 종합해서 강의안을 만들죠. 그리고 시험 문제가 교과서가 아니라 실제 수업한 내용 기준으로 나온다면.. 학생이 교과서를 살 이유가 없어집니다.
2.교과서가 같더라도 판수가 다르다.
얼마 전에 어떤 의대 수업계획서를 검토한 적이 있는데.. 12년 전 출간된 교과서를 지정했더군요. 개개정판이 이미 나왔는데.. 즉 5판은 절판되고 서점에선 이제 7판을 파는데 교수는 5판으로 강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7판과 5판의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두 판 차이면 6~12년 정도 차인데, 그 동안 학설이 바뀔 수 있죠. 치료법도 바뀔 수 있고.. 새로운 게 중요해질 수도 있고. 학생 입장에선 7판을 살 이유가 없어집니다. 5판은 구입할 수가 없으니 교과서 없이 공부하거나 선배에게 빌려서.. .
잘난 인증평가 때문에 필수과목도 늘어났고, 새로운 의학분야도 생겼고... 교과서 두께도 엄청.. 무어 해부학 교과서와 로스 조직학 교과서와 Blumenfeld 신경해부학 교과서 모두 1000페이지 넘습니다. 20년 사이에 교과서 두께가 1.5~2배 늘었습니다.
오래 전에 자칭 조직학 대가라면서 교과서와 무관하게 가르치는 교수의 조직학 수업을 본 적이 있는데.. 간으로 들어가는 정맥을 hepatic vein이라고 가르치더군요. 즉 현미경 사진은 좀 알지만 의학이나 해부학 생리학은 전혀 모르는 대가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검증된 교과서'를 기준으로 가르치라는 겁니다.
근데 번역서는 번역 품질이 문제고.. 오역에 오탈자에 비문이 많죠.
한글 원저 교과서는 신뢰도가 낮고..
저의 경험을 조금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선 최근 학교들 사이 국시 성적 경쟁이 갈 수록 치열해지며 모교의 내신 문제 또한 국시 스타일의 문제를 상당부분 답습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국시 스타일의 문제란 증례를 주고 진단, 치료를 묻는 문제입니다. 같은 질환이더라도 증례 환자의 상황마다 Diagnosis of Choice, Treatment of Choice가 달라지기 때문에 교과서에 우선순위 없이 설명되어 있는 진단, 치료 방법들 중 하나를 고르기는 교과서만 가지고는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일부 교수님들은 국시 스타일의 문제를 출제하신다고 하시며 결국 각 질환 별로 학회에서 발간된 진료지침을 알아야만 풀수 있는 문제 또한 많이 출제되는 현실 입니다. 결국 출제자가 교과서에 어떠한 내용이 어떠한 범위까지 나와있는지 숙지하지 않은 채, 교과서 범위 외 증례문제를 출제하는 경우가 빈번 합니다.
결국 학생들이 교과서를 피하게 되는 이유는 평가 도구 자체가 교과서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인 것 같네요.
Guideline 하나 만드는 것은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 자본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질환에 대해 Guideline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질환에 대해서만 Guideline이 있는 것이지요.
다만, 이 Guideline역시 세세한 디테일에 있어서는 해가 지나면 쉽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라 굳이 바뀔 수 있는 디테일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를 교수가 출제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거죠.
이를테면 지난 10여년동안 고혈압의 정의나 target BP에 대한 것도 JNC7판, 8판, ESH/ESC, ACC/AHA 등을 거치며 굉장히 빈번하게 바뀌었습니다.
세세한 디테일보다는 Guideline이 바뀌어도 변치않는 가장 중요한 원칙들을 출제하는 것이 타당하지요.
그런데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은, 국시든 내신이든 해가 갈 수록 족보(?)가 나돌면서 학생들이 지난 문제들을 학습하게 되고, 문제의 타당도는 계속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수 입장에서는 변별력을 위해서 점점 어려운 문제를 만들 수밖에 없어지는 점도 있긴 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심지어 USMLE나 KMLE도 예외는 아닙니다. USMLE 또한 매년 학생들의 절대성적이 조금씩 오르고 있고, 그에 따라 실제 USMLE문제도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으며, USMLE대비 사설 문제집은 거의 전문의 시험에 나올 법한 난이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미국의 많은 faculty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USMLE성적과 실제 Clinical performance가 반드시 correlation되지는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여전히 레지던트를 선발할 때 성적을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로 고려되고 있지요.
학생들 역시 이를 무시할 수 없어서 성적을 위해서는 교과서보단 이전 문제를 학습해야되고, 그에 따라 가장 중요한 원칙보다 바뀔 수 있는 디테일에 아까운 시간을 쓰게 되는 거라고 봅니다.
물론 원서는 학생들이 짧은 시간에 읽기가 힘들고, 번역서는 대개 품질이 안 좋다는 문제가 항상 있습니다. 번역서는 교수 연구실적이나 교육실적에 포함이 안되니 교수 입장에선 대충 번역하거나 대리 번역시키는 게 유리합니다. 반대로 제가 꼼꼼하게 번역해 놓으면 다음 판 때 출판사가 번역권을 빼앗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책이 잘 안팔린다는 이유를 대며.. 그래서 요즘은 번역권 빼앗길 걱정이 적은 DK 기초의학 책에 더 관심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