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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조직학 교수인 Krstic 박사가 손수 그린 그림책이 유명합니다. 1991년 영어판이 나온 후 절판되었는데.. 오래된 책이지만 교육 효과가 좋아서 지금도 매우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300불이 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일어판이 나왔습니다. 교보 통해서 구입했는데, 58000원이 들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확인해보십쇼. 단 영어판에 비해 축소 인쇄되었습니다. 영아판은 600쪽이 넘는데, 일어판은 350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컴퓨터 발전 덕분에 인쇄 상태는 훨씬 좋습니다.
사실 arachnoid mater, arachnoid granulation, CSF의 흐름을 gross anatomy가 아닌 histology수준에서 잘 그린 교과서가 드물지요
Kierszembaum교수의 조직학 교과서가 그나마 세포수준의 삽화를 잘 그려놨는데, 저건 그것보다도 탁월하군요.
Krstic교수의 liver parenchyma - sinusoid의 관계도나 glomerulus의 podocyte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지네요.
Springer 출판사에서 색 입힌 다음에 ebook으로 내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저정도 수준에 컬러 Atlas면 $300이 아깝지 않지요.
유럽엔 동네에 그리스 로마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인상파 등등 걸작 예술품과 건축물이 널려 있는 곳이 꽤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미적 안목이 높아질 수 밖에 없죠. 이 아이들이 자라서 람보르기니를 디자인하고 가우디 성당을 설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미국은 젊었을 때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노후가 비참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유럽은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하든 사회에 기여만 하면 자녀 양육과 노후가 보장되기 때문에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할 동기가 적습니다. 그래서 Krstic 교수가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고 재능을 낭비해가면서 이런 그림을 그린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덕분에 저는 별 노력 없이 Krstic 교수의 책을 사서 그림을 스캔한 후 수업하고.. 학생들은 걸작 그림으로 공부하니 좋고.. 학생들은 의사가 되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결국 Krstic 교수와 독일 프로메테우스 저자들이 인류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책 단점이라면..
1991년 책이라 최신 지식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거.. 저자가 은퇴한 후로는 개정판이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미 돌아가셨을 나이고.. 사실 나이 들면 이런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죠. 게다가 수십년 동안 조직학을 연구한 학자가 마스터 수준의 일러스트레이션 재능을 유지한다는 건..
그리고 출판사가 이미 디지털 그림으로 변환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조만간 최신 세포생물학과 조직학 지식이 업데이트된 컬러 도감이 나올지도..
요즘 의학교재 출판사들은 교수가 교재로 지정해줄 수 있는 책만 만듭니다. 이 책은 조직학 수업하는 교수들에게나 중요하지 학생들에겐..
그리고 의학교과서 번역에서 가장 위험한 건 '표현이 매끄럽지 못 한 문장'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는 문장'입니다. 후자의 교과서로 공부한 의대생이 나중에 의사가 되어 환자를 치료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조직학 교과서에(원서를 지정해줘도 학생들은 대개 번역서를 구입함) '진실을 왜곡하는 문장'이 일부 챕터에서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조직학 수업을 한번도 수강하지 않은 생화학 전공자가 해부학 신임교수가 되어 조직학을 가르치는 건 좋은데.. 5년쯤 조직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조직학 교과서 번역에 참여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식약청에서 약품을 까다롭게 심사해서 시판을 허가하듯이.. 의대 교과서는 식약청이나 보건복지부에서 검사해서 통과된 책만 판매하도록 규정을 만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의대 교과서는 직접 간접으로 환자 건강이나 생명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 학생이나 알바 대리번역도 사라질 거고.. 조직학 처음 배운 교수가 조직학 책 번역하는 일도 사라질 거고..
다만, 의학 교과서의 질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교과서 하나의 정보량은 방대하기 때문에, 검사할 수 있는 인력이나 시간을 고려할 때 전수검사는 현실적이지 않겠지요. 게다가 결국 이런 작업은 전문가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는데, 번역에 공을 들이지 않는 전문가들이 심사를 성의있게 할 지는...
게다가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원서도 오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라서, 심지어 해리슨 같은 굉장히 권위있는 교과서에도 가끔 발견되는데 좀 덜 유명한 교과서는 더 심하겠지요. 그러다보니 교과서 앞에는 그러한 점을 의식해서 "이 책의 지식을 환자의 치료에 이용할 때는 스스로의 판단과 양식을 이용하라," "이 교과서의 지식을 이용하여 환자를 진료했을 때 발생한 손해, 부상에 대해서 저자와 출판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써있지요.
어쨌든 수준 미달의 교과서를 걸러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현실적이지 않다면, 결국 교과서를 이용하는 이용자 역시 교과서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과 양식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저질 교과서로 얻은 정보때문에 환자에게 해가 발생했다고 해서 의사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음은 물론이고요.
의대생은...글쎄요 요즘 의대생들은 교과서를 잘 안 읽기 때문에...그렇다면 결국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강의록을 작성 or 교과서를 번역하시는 교수님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책에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최소한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데..
게다가 요즘 들어 수준 미달 교과서가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한 예로 'inner ear에서 crista ampullaris의 cupula에 otolith가 적다'고 알고 있는 저희 학생이 있었습니다. '적다'가 아니라 '없다'가 맞죠. 그런데 학생이 갖고 있는 조직학 번역서를 보니까 실제로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그래서 원서를 확인해 보니 'lack'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없다'라고 번역했어야 하는데.. 생리학이나 조직학 공부한 사람이면 cupula엔 돌이 없다는 거 당연히 아는데 말입니다. 전공 지식이 없는 분이 번역하니까 이런 일이..
난소와 난자를 혼동해서 번역한 조직학 교과서도 있습니다.
교과서 감수도 쉽지 않습니다. 원서를 정독하면서 번역원고를 감수해야 하니까 시간이 무지 걸립니다. 근데 교과서는 감수료도 안 줍니다..
R&D보단 제네릭에 좀 더 치중하는 국내 제약회사, 양질의 교과서를 출판하기 보단 상대적으로 수준이 얕거나 대충 번역된 번역서를 위주로 출판하는 출판사... 물론 이게 일방적으로 잘못됐다고 하기엔, 출판사나 제약회사도 할 말이 많겠지요.
그나마 학회차원에서 교수님들이 모여 집필한 교과서들이 그나마 어느정도 팔리고 있지만, 전반적인 깊이나 다양성, 삽화나 편집수준 등을 고려하면 아직까지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외 저명한 교과서를 보면 한국인 교수님들 몇몇 분도 contributor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저자의 역량이 부족해서 해리슨이나 넬슨같은 masterpiece를 만들 수 없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교육 자체에 관심이 없는 교수, 관심이 있어도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는 환경,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 작은 내수시장과 출판사 규모, 전문 medical illustrator/designer의 부재 등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학생이나 레지던트가 자기가 의대시험/전문의시험 준비하면서 정리한 노트를 그대로 출판하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인기가 없냐하면 또 그건 아니라서, 꽤 잘 팔리는 것들은 2판, 3판도 나오더군요.)
전세계 거의 모든 USMLE수험자들이 보는 First Aid for the USMLE 역시 저자가 수험 때 정리했던 노트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전세계 모든 의대생들이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해서 가장 많이 읽히는 매년 개정되는 수험서가 됐지요. 그런점에서 잘 팔리는 교과서가 항상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죠.
(물론 국내 수험서랑 First Aid를 1대1로 비교할 순 없지요. First Aid는 "영어"로 씌어있고 USMLE를 보려는 사람은 전 세계 수 만 명이 있으니까...)
어쨌든 이런 다양성은 좀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