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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너무 길어져서 새 글로 올립니다.
의대 공부를 교과서 위주가 아닌 족보 위주로 하는 것은 나쁘다기 보다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1. 많은 교수님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은 족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족보의 문제와 답을 기계적으로 외우는 식으로 족보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족보를 통해 가장 출제 가능성이 높은 토픽을 위주로 공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지요. 족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학생들의 학력의 저하로 이어진다거나 학생들의 나태함을 조장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족보 자체의 양도 이미 굉장히 방대하니까요. 오히려 족보를 풀어봄으로써 학습목표를 충분이 인식하고 해당 지식에 대한 이해가 더욱 심화되며,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효과도 있지요.
2. 게다가 학생이 고지식하게 교과서만 공부해서 시험을 잘 봤다고 한다면, 그 시험 문제는 오히려 잘못 출제된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지식을 아는 것과 그것을 문제풀이에 활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고영역이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문항 출제 가이드라인에서는 단순 암기형 문제보다 실례를 바탕으로 한 임상에서의 활용 문제를 내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깊은 지식을 쌓는 것,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 모두가 중요한 것이지요.
다만 족보 위주의 학습에도 분명한 단점은 있습니다.
1. 학생들은 단순히 족보를 통해 중요한 것을 습득하는 것이 아닌, 교수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특정 교수님이 3년, 2년, 1년 전 족보에서 모두 동일한 문제를 냈다면, 학생들은 그 교수님이 수업했던 부분은 공부를 하지 않고 그야말로 족보의 문제와 답만 외우겠지요. 반대로 어떤 교수님이 3년, 2년, 1년 전 족보에서 모두 다르고 어려운 문제를 냈다면, 학생들은 오히려 그 부분을 포기하고 좀 더 "족보를 많이 타는" 다른 부분에 더 시간을 투자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교수의 출제 성향에 따라 특정 분야의 지식에 편차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2. 학생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성적입니다만 사실 시험의, 그리고 출제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변별입니다. 시험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는 타당도, 신뢰도, 분별도 등의 여러가지가 있으며, 족보의 공개로 몇몇 척도가 하락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매 시험마다 문제를 전부 다르게 하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그것도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일단 매 시험을 다르게 출제하는 시간과 노력은 차치하고서라도, 문제는 출제되는 것으로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당 문제가 출제된 후 학생들이 어떤 답을 했는지 그 분포에 따라 지나치게 오답률이 높으면 정답가지를 좀 더 명확하게 바꾼다거나, 오답률이 지나치게 낮으면 매력적인 오답 선지를 추가한다거나 하는 등 문제 역시 출제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개선되어 나가면서 좋은 문제로 거듭나는 겁니다. (물론 그런 노력을 모든 교수님들이 다 하시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런데 그런 식으로 다듬어져 완성된 "좋은"문제도 족보가 공개되면 변별력이 전혀 없는 쓰레기 문제가 되겠지요.
3.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이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음에도 단순히 문제내기 좋다는 이유로 반드시 알 필요가 없는 지식을 출제하는 교수님도 있지요. 혹은 자신의 연구분야에 관계된 지나치게 세부적인 것을 내는 교수님도 있고요. 또한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의 "전부"도 아닙니다. 물론 족보 자체의 양도 학생 입장에서는 굉장히 많은 양입니다만, 학생 또한 족보로 자신의 지식과 시야를 한정시켜버리면 안되겠지요.
실제 환자는 시험문제보다 훨씬 불확실하고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명확한 답이 없는 경우도 많고, 명확한 답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지요. 학생들이 의사가 되면 시험을 잘 쳤든 못 쳤든 상관없이 그런 문제들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이 때 족보로 얻은 지식은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보다 스스로 진지하게 학문을 갈고 닦은 사람이 그런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가능성이 높지요.
어쨌든 제 의견을 종합하자면
1. 족보는 커닝과 다르게 부정행위가 아닌 공부의 한 형태이며, 이것이 학력의 저하로 이어진다거나 나태함을 조장한다고 욕하면 안된다.
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은 족보에 자신의 능력을 한정시켜서도 안된다.
3. 좋은 문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비공개/문제은행식 시험에서 족보는 시험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cf. 족보가 부정행위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이는 국시/내신 시험이 공개임을 전제한 것입니다. 예전처럼 국시가 비공개, 문제은행 방식이었고, 학생들이 기억해온 문제를 바탕으로 만든 국시대비용 문제집으로 공부한다면,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부정행위(e.g., 저작권 위반, 공무집행 방해 등)일 수 있습니다.
기초의학 수업을 빨리 시작하는 예가 유럽입니다. 유럽은 의대가 6년제인데, 우리 의예과에 해당되는 1학년과 2학년 때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수업을 끝냅니다. 그리고 기초의학 국가고시를 봅니다(독일은 피지쿰이라고 함). 그리고 3학년(한국 본과1학년에 해당)이 되면 병리학 미생물학 등을 시작합니다.
한 학원에서 선전하는 헝가리 의대(6년제) 커리큘럼을 보니까 입학하자마자 해부학 수업을 시작해서 무려 4학기 동안 진행하더군요. 이게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지금 미국식도 아니고 유럽식도 아닌 애매한 방식인데, 어느 게 좋은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엔 미국처럼 하려면 7년제 의대(2+5)가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과 때 기초과학과 기초의학을 제대로 가르칠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도 고교 졸업 후 바로 시작하는 7년제 의대가 있습니다. 뉴욕시립의대가 그렇고, 일부 의대가 7년제도 병행한다고 합니다. 치대 약대 수의대 한의대가 모두 6년제인데 수업량이 훨씬 많은 의대가 같은 6년제라는 건 좀..